MC소리

이형기 - 상처 감추기

강씨네수다 2020. 3. 11. 01:23


* 이 공간에는 영화 페이지에 쓰지 못하는 제 생각들이나 영화 OST를 짧게 담도록 하겠습니다. 




상처 감추기

 

 

시를 왜 쉽게 쓸 것인가 

어렵게 어렵게 미로를 만들고 

또 시계제로의 짙은 안개를 피워서 

그 어느 후미진 행간에 

누구도 보아서는 안 될 나의 상처를 감추자

   

그날부터 나의 두 눈에서는 

모래가 자꾸만 흘러나온다 

그 모래 쌓이고 쌓여서 

가슴에 거대한 사막 하나 펼쳐진다 

지금은 우리 시대의 가장 어두운 밤이다

  

나는 여태껏 말을 믿어본 일이 없다 

말의 낙타를 타고 말이 없는 곳 

한 마리 방울뱀의 침묵 속에 묻히려고 

나는 평생을 일해서 나의 파멸을 벌었다 

그것은 단 한 줄의 어려운 시

  

비밀에는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 있다 

차가운 저주가 있다 

나의 시를 해독하는 자는 

반드시 저 사막으로 쫓겨나 죽으리라 

그리고 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 

 

끝내 아물 수가 없는 상처 

오직 그것만이 우리들 각자의 

세계의 폐허 위에 살아남는다 

시를 왜 쉽게 쓸 것인가

 

 

-이형기, 시집<죽지 않는 도시>, 1994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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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형기 시인은 '낙화' '폭포' 등 학창시절 보았던 시를 쓴 분입니다.


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좀 충격이었습니다.

평소 예술 작품은 쉬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도 왠지 모르게 이 시에 공감이 되었거든요.

시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작품은

자신의 내면/상처 를 드러내는 동시에 숨기려는 양가적 욕망의 결과물일지도 모릅니다.

사람 관계에서도 '나'를 이해 받고 싶으면서도 '나'를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끔 들죠.


'오직 상처만이 살아남는다.'

자신의 상처를 미워하지 말아요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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